"어...? "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낯선 천장이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을 때는 침대 위에 있었고, 침대 옆에는 작은 협탁이, 그리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온통 하얀 바닥과 온통 하얀 벽, 그리고 온통 하얀 벽 가운데 갈색 나무문 하나. 그것이 지금 보이는 공간에 있는 전부였다.
"이게... 뭐지...? "
협탁 옆에는 '규칙서'라고 쓰인 A4종이 한 장과 알약 하나, 그리고 알약 하나를 삼킬 수 있는 분량의 물이 놓여져 있었다. 알약은 흔히 보는 오메가 3 영양제 비슷한 반투명한 캡슐이었고, 마치 에메랄드를 수화시킨 것 같은 매혹적인 초록색이었다. 규칙서라고 쓰여있는 종이를 집어들고 읽어보니, 종이에는 '죽을 것 같으면 알약을 삼켜, 놈들에게 죽는 것보단 나을거야'라고 쓰여있었다. 어린애가 쓴 건가 싶게 삐뚤빼뚤했지만, 그래도 못 읽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걸 쓴 놈도 어지간히 악필이었나보군... '
알약과 물병, 규칙서를 집어들고 문 밖으로 나갔지만, 밖에 보이는 것은 캄캄한 복도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호텔 로비에서 승강기를 타고 올라오자마자 마주치는 객실들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지만, 여행지의 호텔과 달리 흡음재라도 쓴 건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고요했다. 방 밖으로 완전히 나온 다음 그 위치에서 주변을 둘러보면, 방금까지만 해도 나와있었던 방문이 없어졌다는 것 외에는 별다를 게 없었다. 방금까지 있었던 공간과 마찬가지로 온통 하얀 벽과 바닥 중간중간 갈색 나무문이 보였고, 호텔 객실 번호처럼 1, 2, 3, 4... 순서대로 숫자가 붙은 나무문이 양쪽으로 마주보고 있었다. 마주보고 있는 나무문은 닫혀있거나 열려있었는데, 닫혀있는 문은 안에서 잠겨있는 것을 보면 아마 여기에는 투숙객들이 있는 모양이다.
적막한 복도를 지나 쭉 걸어가면 복도 끝에는 박물관이나 고급 저택에 있을법한 고급진 거울이 보였다. 앤티크한 테두리 안에 있는 거울은 전신을 있는 그대로 비추고 있었고, 그 외에 별다를 것은 없어보였다.
"......! "
옷매무새라도 고쳐볼까, 하고 거울을 들여다본 순간, 거울 너머로 까만 그림자가 보였다. 찰박거리면서 뭔가를 질질 끌고 가는 소리와 함께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는, 거울 너머로 보기만 해도 뒤를 돌아 실체를 확인하는 것조차 두려워질 정도였다. 천천히 다가오는 그림자를 본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죽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검고 미끈거리는 촉수와 탁구공만한 눈알 여러개가 다닥다닥 붙은 얼굴이었고, 도저히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 저것이 규칙서에 쓰여있는 '놈들'이라면 차라리 알약을 삼키고 죽는 게 낫겠다 싶어 알약을 입에 넣고 물을 마셨다.
"어, 어떻게 된 거지? "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눈을 떴을때는, 처음에 눈을 떴던 흰 방에 와 있었다. 침대 위에서 눈을 떴고, 침대 옆에는 협탁이 보이고, 협탁 위에는 규칙서와 알약, 물이 놓여있었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은, 규칙서에 '복도 끝에 있는 거울을 10초 이상 응시하지 마. 놈들이 너의 존재를 알아챌거야.'라는 문구가 추가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역시, 아까 그 그림자의 정체가 '놈들'이었군. 잡히기 전에 알약을 먹어서 다행이야. 까딱하면 다시는 여기서 눈도 못 뜰 뻔 했네.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규칙서와 알약을 챙겨 밖으로 나가면 여전히 적막한 복도가 보인다. 이전처럼 어떤 방은 잠겨있고, 어떤 방은 열려있었으며, 멀리 복도 끝에는 거울이 보였다. 거울은 오랫동안 보면 안 된다고 했으니, 최대한 거울을 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다른 방으로 가보자. 그렇게 생각하고 1번 방의 문을 열었다.
"날 웃게 해 줄 사람, 어디 없을까? "
1번 방 안에 있는 것은 광대였다. 어릴 적에 서커스 공연에서도 몇 번 봤던 피에로였지만, 특이하게도 분장이 웃는 모양이 아니라 슬픈 모양이었다. 그 광대에게 이 곳이 어디인지, 나가는 길은 어디인지 알려달라고 하자 광대는 '자신을 웃게 만든다면 가르쳐주겠다'고 했고, 나는 내가 아는 모든 개그들을 총동원했지만 광대는 웃지 않았다. 한참동안 나의 개그를 지루하다는 듯 보던 광대는 품 속에서 칼 하나를 꺼낸 다음 자신을 웃게 만들 법을 가르쳐주겠다고 했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는 알약을 삼켰다.
그리고 예의 방에서 눈을 뜬 나는 제일 먼저 규칙서를 확인했다. 규칙서에는 '광대를 웃게 할 방법은 피를 흘리는거야. 스스로를 다치게 할 수록 그는 더 크게 웃을거야.'라는 규칙이 추가됐고, 그 방법대로 광대가 있는 방에 들어간 나는 광대에게 잘 드는 칼을 빌려 내 몸에서 피를 냈다. 아픔을 참아가면서 피를 흘리자 광대는 배를 잡고 깔깔 웃었고, 오랜만에 만족할만큼 웃었다면서 등 뒤에 있는 붉은 문으로 가면 된다고 했다.
'속았다...! '
그리고 광대의 말에 따라 들어간 내가 본 것은 쇳덩이도 단번에 녹일 정도로 뜨거운 불이었다. 이야기가 다르지 않냐며 따지려고 했지만 문은 사라져서 나갈 수 없었고, 그 상황에서 내 선택지는 두 개였다. 안에서 타죽거나, 타죽기 전에 알약을 먹고 죽거나. 그리고 또 다시 알약을 먹고 예의 방에서 눈을 뜬 내가 본 규칙서에는 '광대가 가르쳐주는 문의 색이 붉은 색이라면,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여태까지 들었던 이야기들 중 가장 재미있었다면서 미친듯이 웃어'라고 쓰여있었다. 붉은색, 붉은색이라, 그러고보니 아까 그 불길이 치솟았던 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붉은색이었던 것도 같고.
광대를 웃게 만들면 된다는 건 알았지만, 더는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던 나는 2번 방으로 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나를 반긴 것은 베일로 눈을 가린 귀부인이었다. 영화에서나 봤던 화려하고 통이 넓은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은, 고풍스러운 검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나에게 룸서비스는 언제 오는지 묻는 목소리에서 미미하게 분노가 드러나고 있었다. 룸 서비스라뇨? 저는 여기 직원이 아니라 손님입니다만.
"부인, 저는 이 곳의 직원이 아니라 손님으로 왔습니다. "
"무례하군요. 제가 언제 반문해도 좋다고 했죠?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지 않으면 사람을 부르겠어요. "
나는 여기 손님이지 직원이 아니라고 최대한 정중하게 얘기했지만, 귀부인은 그런 나에게 무례하다고 쏘아붙이며 지금 당장 나가지 않으면 사람을 부르겠다고 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고요! 아무리 억울함을 피력해봤지만 귀부인은 당장 나가라는 말만 반복했고, 곧 누군가 나타나 내 팔을 잡았다. 아니, 누군가가 아니라 미끌거리고 축축한 무언가였다. 물을 마실 여유도 없었던 나는 미끌거리고 축축한 촉수가 내 오른팔을 잡아채기 전에 재빨리 알약을 삼켰고, 다시 예의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2번 방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방 오른쪽에 있는 손님용 카트가 필요해. 카트 위에 음식이 올려져있다면 그대로 끌고가면 돼. 카트 위에 음식이 올려져있지 않다면 카트 위 와인잔의 절반을 피로 채운 다음 귀부인에게 가져가서 정중하게 '음식 조리가 오래 걸릴 것 같아 음료부터 가져왔습니다'라고 해. '
갱신된 규칙서에는 귀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 적혀있었다. 방 오른쪽에 카트가 있었던가? 복도만 탐색하느라 그 옆은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이번에 나가서 한 번 둘러보지, 뭐. 그렇게 생각하고 방 밖을 나와 양 옆을 둘러보니, 왼쪽과 오른쪽에도 지나갈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왼쪽 공간으로 보이는 것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복도였고, 오른쪽 공간에 은색 카트 한 대가 놓여져 있었다. 카트 위에 덮개로 덮인 접시가 있었고, 덮개를 열어보자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나오는 음식이 있었다.
그대로 카트를 끌고 2번방으로 가 귀부인에게 룸서비스가 준비되었다고 하자, 귀부인은 감사를 표하면서 소원이 있는지 물었다. 하지만 이 공간을 나갈 길을 찾는다고 하자, 귀부인은 자신도 이 공간을 나가는 법은 모른다면서 미안한지 팁으로 금화 하나를 줬다. 쯧, 여기도 별 소득은 없군.
이번에는 3번 방으로 들어갔다. 노크를 하고 들어갔지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대신 편지 하나가 놓여있었다. 편지봉투를 조심스럽게 뜯어 내용물을 봤지만 편지는 알 수 없는 문자로 쓰여있었다. 히브리어나 힌디어, 태국어같이 다른 나라에서 쓰는 알파벳이 아니라 이집트 상형문자 비슷하게 생긴 그림이었는데 의미를 도저히 모르겠는 말뿐이었다. 알 수 없는 문자를 읽은 탓인지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왔고, 급기야는 코피까지 흘리는 상황이 정상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나는 다시 알약을 삼켰다. 정확히는, 그렇게라도 해서 편해져야먄 할 것 같은 두통이 편지를 읽는 순간부터 나를 엄습했다.
'3번 방의 편지는 읽어봐야 인간인 너는 이해할 수 없어. 정신이 오염돼서 극심한 두통때문에 코피를 쏟다가 과다출혈로 죽게 될 거야. '
뭔가 이상했다. 여기가 그러니까, 외국도 아니고 아예 이 세계도 아닌건가? 정신이 오염된다는 건 무슨 소리지? 그런 질문을 갖고 알약을 먹고 쓰러진 나에게 규칙서는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이해하는것조차 인간의 능력 밖'이라고 했다.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을때는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고, 그 뒤 정신을 잃은 나에게 규칙서는 방에서 10분 이상 있으면 안 된다고 했다. 대체 여기는 뭐지? 뭐 하는 공간이지?
복도를 따라가면서 4번 방부터 열려있는지 확인했지만, 다른 방들은 전부 잠겨있었다. 그렇게 거울이 있는 복도에 다다르자 어딘가 꺾여있는 공간이 나왔다. 저기로 가면 나갈 수 있나? 희미한 조명을 따라 가 보니 작은 나무문이 보였고, 나무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간 내 콧속으로는 퀴퀴한 곰팡내와 바다냄새가 빠른 속도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기서 나가려고 했지만 어느새 문은 사라져 있었고, 센서로 작동하는 모양인지 바닥에 있는 컨베이어 벨트가 움직이면서 나를 어딘가로 데려가고 있었다.
'거울 왼쪽에 있는 방은 네가 들어가서 좋을 게 없어. '
컨베이어벨트가 최종적으로 나를 데려가려는 곳은 고기를 다지는 기계 안이었고, 나는 다진 고기가 되기 전에 알약을 삼킨 후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도 나가기 위해 여러 방법을 시도해봤지만, 나는 죽기 직전에 알약을 먹고 다시 이 방으로 돌아와야 했다. 누가, 왜, 어째서 나를 여기에 가둔건지도 몰랐다.
내가 죽을때마다 갱신된 규칙서는 A4 한 장이던 게 몇 장으로 늘고, 노트 한 권으로 늘더니 어느새 책 한 권이 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또 어떻게 해야 하나, 규칙서를 펼쳐보던 나는 빼곡한 규칙들을 지나 맨 마지막 페이지에 추가된 규칙을 발견했다. 정갈한 글씨로 '복도 끝의 거울을 깨면 이 세계의 진실을 알 수 있지만, 다시는 원래의 너로 돌아갈 수 없어'라고 쓰여있었다. 이 세계의 진실? 그럼 여기가 어디고, 내가 누구이고, 왜 여기 있는지도 알 수 있는건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제법 두꺼워진 책으로 거울을 내리쳤다. 이 정도 두께의 책으로도 쉽게 깨지는건가 쉽게 거울은 간단하게 깨졌다.
'이번에도 돌아가지 못 했네. '
알 수 없는 말소리가 들리면서, 내 몸이 어딘가 이상해지고 있었다. 온 몸에서 끈적한 점액질이 분비되기 시작했고, 팔다리는 길다란 촉수가 되어갔다. 덩치가 커지면서 점액질때문에 옷은 다 녹아버렸고, 거울 조각 너머로 보이는 내 얼굴은 탁구공만한 눈알 여러개가 달린 얼굴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게 뭐지? 세계의 진실은? 나는 왜 이렇게 된 거지? 내가 내가 아니게 된다는 건 이런 의미인가?
뭐라 생각할 틈도 없었다.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나오더니 복도 주변을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지 소리치고, 복도 끝에 있는 거울로 다가갔다. 어, 여기에 오래 서 있으면 위험한데. 그렇게 생각한 나는 누군가에게 경고해주기 위해 다가갔고, 거울에 비친 누군가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이 세계의 진실을 알게 됐다.
거울 속에 있는 건 나였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믿기지 않겠지만, 그건 진짜로 나였다. 이미 괴물로 변해버린 것도 나였고, 거울을 보고 두려움에 휩싸여 알약을 들이키고 죽은 사람 역시 나였다.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분명히 둘 다 나였다. 저 나만큼은 여기서 나갈 수 있게 도와주자, 그렇게 생각한 나는 어떻게든 인간이 알아볼 수 있게끔 최대한 또박또박 글씨를 썼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A4에서 시작해서 노트, 책 한 권까지 오게 된 규칙서 역시, 믿기지 않겠지만 내가 썼다는 얘기가 되겠지.
하지만 나에게는 아직까지 한 가지 질문이 남아있었다. 그럼 저 나도 실패하게 되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그 질문에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내 답을 찾았다. 왜냐하면, 내가 거울을 깨기 전에 복도에는 7번방이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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