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
시계가 오후 두 시를 가리킬 무렵, 괴담수사대 사무실로 대학생은 되어보이는 젊은 남자가 들어섰다. 건장한 체격에 투블럭으로 스타일을 낸 머리를 가진 남자는 아직 군기가 채 빠지지 않은 듯 걸음걸이 하나하나마다 어딘가 각이 잡혀있었다.
“꿈때문에 한 번 방문하고 싶다는 연락은 받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꿈때문에 찾아오신건가요? ”
“친구가 자꾸 꿈에 나옵니다. ”
“친구가요? ”
“네. 어쩌다 한 번이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군대 전역하고 나서는 매일같이 같은 꿈만 꾸고 있어요. ”
군대를 전역한 후, 그는 매일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꿈 속에서 그는 중학생 시절로 돌아가 있었고, 항상 집 안에 있었고, 집 밖에서 친구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친구가 부르는 소리가 나서 나가려고 하면 가족들이 못 나가게 막곤 했다. 어떨때는 엄마가, 어떨떄는 아빠가, 그리고 또 어떨때는 누나가, 가끔은 할머니가. 그래서 오늘은 못 놀 것 같다고 하는데도, 친구는 밖에서 한사코 나오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알람이 울려서 잠에서 깼을때도 푹 잤다는 느낌보다는 피로가 채 풀리지 않은 느낌이 강했다.
“친구분과는 사이가 어땠나요? ”
“전학만 안 갔으면… 그리고 연략만 안 끊겼으면 지금도 하하호호 하면서 같이 술 한 잔 했을겁니다. 그 친구랑은 초등학교 5학년때 만나서 고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 항상 같이 다녔는데, 거의 5년동안 같이 다니면서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어요. ”
특이하게도, 꿈에 나온 친구와는 헤어지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다. 어느 한쪽이 갈등을 회피하거나 참고 넘어가서가 아니라, 둘이 너무 잘 맞아서 서로 갈등을 빚을 일이 없었기 떄문이었다. 아 하면 어 하고, 어 하면 아 할 정도로 죽이 잘 맞아서 친구가 전학 가는 날은 서로 울기도 했을 정도니까. 연락이 끊어지게 된 이유도 둘이 싸워서가 아니라, 한쪽이 멀리 전학을 가서 만나기가 힘들었던데다 둘 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학업때문에 바빠져서였다.
“그 친구랑은 한번도 싸운 적은 없었어요. 같이 다니는 다른 친구들이 니들은 어떻게 한번도 안 싸우냐면서 비결을 묻기도 했을 정도니… ”
“막역한 사이였군요. 고등학생때 학업때문에 연락이 끊겼는데, 그 뒤로 연락하신 적은 있으신가요? ”
“가장 최근에 그 친구랑 연락한 게 작년이었나… 재작년이었나… 수능 끝나고였어요. 아마 그 뒤로 재수한다고 했으니까 재작년일겁니다. ”
연락이 끊어졌던 그 친구와 가장 최근에 연락이 닿았던 건 수능을 친 다음이었다. 오랜만에 연락해서 서로 안부를 묻고, 수능 성적은 어떻게 됐는지와 군대는 어떻게 할 건지를 물었을 때 그는 지망하던 대학에 간당간당할 정도라 군대에 가서 수능을 다시 칠 생각이라고 했고, 친구 역시 성적이 좋지 않아서 재수를 할 생각이라고 했다. 그 뒤로 친구의 생일날 다시 한 번 연락을 해봤지만, 재수하느라 바쁜 탓인지 친구는 연락을 받지 않았다.
“꿈 속에서 어릴 적으로 돌아가는 것 말고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나요? ”
“그 친구가 밖에서 부르는거랑, 저는 집 안에 있는 거, 그리고 집 안에서 다른 식구들이 못 나가게 하는 거… 항상 똑같아요. 어떨때는 부모님이 못 나가게 하고, 어떨 때는 누나가 못 나가게 하고, 가끔은 할머니가 못 나가게 할 때도 있어요. ”
“아마 꿈 속에서 다른 사람을 따라가게 되면 죽기 때문일 겁니다. ”
“저희 고모도 같은 말씀을 하셨어요. ”
“고모님이요? ”
“네. 저희 고모가 신기가 좀 있으신데, 그 꿈을 꾸고 나면 항상 고모한테서 연락이 와 있거든요. ”
그에게는 신내림을 받은 고모가 한 명 있었다. 친구가 나오는 꿈을 꾸고 나면 전화든 문자든, 항상 고모가 ‘살아있냐?’면서 연락을 하셨고 어떨때는 꿈에 친구가 나오지 않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럴때마다 꿈 꿨다는 얘기를 하고, 누가 못 나가게 막았다고 하면 고모는 꿈 속에서는 누가 집 밖에서 불러도 절대 나가면 안 된다, 어떤 사탕발림으로 꼬셔도 그 친구를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말로 연락을 마쳤다. 그 뒤로도 계속 같은 꿈을 꾸는 게 뭔가 이상해서 C도 무당을 찾아갔을 때, C도 무당 역시 가족들이 안 막아줬으면 옛저녁에 죽었을 팔자라면서 꿈 속에서는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절대 따라가지 말라는 말을 했다.
남자가 돌아간 후, 미기야는 손님의 동창들을 만나기로 했다. 지금까지 몇 명인가 괴담수사대를 찾았던 사람들 중에 자기 잘못을 숨기고 말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기도 했고, 인간관계라는 건 한 쪽의 얘기만 듣고 섣불리 판단하면 안된다고 생각해서였다. 고키부리 사무실을 통해 수소문한 남자의 동창들과 약속을 잡은 미기야는, 동창들을 만나기 위해 G구의 지식산업단지로 갔다. 두 번인가 일때문에 온 적은 있지만, 조사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 그 곳에 간 건 간만이었다.
“걔네 둘, 찐으로 친했어요. 성현이는 아버지가 직업군인인가? 그래서 엇나갔다간 바로 염라대왕 만나러 갈 거라고 말하고 다녔고, 정석이도 범생이 스타일이라 엇나가거나 그런 건 없었던 걸로 기억해요. ”
“그럼 두 분이 중학교에 올라오면서부터 친구였던 것도 사실인가요? ”
“네. 다른 반이었을때도 쉬는 시간마다 놀러오고, 하교할때도 기다렸다가 같이 가고 그랬어요. ”
“그럼 정석이라는 분과는 언제 연락이 끊겼나요? ”
“중학교 졸업하고 나서요. ”
동창 역시 남자와 마찬가지로 고등학교에 가면서, 친구가 전학을 가면서부터 친구와 연락이 끊어졌다.
“걔네 아버지가 지방 지사로 발령나서 대전인가 어디로 이사간다고 전학가면서 연락이 끊어졌는데, 그떄는 뭐 다들 고딩이라 학업때문에 바쁠 때라 그런가보다 했죠. ”
“…… ”
“그 뒤로 수능 끝나고 딱 한번 연락 왔었는데, 수능 쳤던 게 잘 안 돼서 재수한다는 얘기만 들었어요. 그러고 한 1년 가까이 연락이 없다가 부고 문자 받았고요. ”
“부고요? ”
재수한다고 연락이 다시 끊어졌던 친구의 마지막 연락은 본인상이었다. 남자도 연락을 받았을지는 모르겠지만, 남자의 꿈에 나오는 친구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둘이 진짜 10년지기 바이브였는데… 참 아쉬웠죠. ”
그 뒤로 옆 건물에서 만난 동창은 남자는 물론 친구와도 어릴적부터 같이 지냈던 친구였다. 동창의 말로는 같이 지내면서도 크게 싸우거나 사이가 틀어질 일은 없었다고 했다. 남자가 워낙 체구가 좋았던 탓에 일진들도 남자와 친구들은 건드리지 않았던데다가, 본인도 바른생활 사나이다보니 학폭같은 데 연루될 건덕지도 없었다. 동창은 친구 역시 모범생 스타일에 바른생활 사나이였다고 회상했다.
“급식에 순대볶음 나온 날, 둘 다 깻잎만 남겨서 영양사 쌤한테 혼난 적 있었어요. 둘 다 깻잎을 싫어하거든요. ”
“그래요? 둘이 취향도 비슷했나요? ”
“좋아하는 애니도 비슷하고, 좋아하는 게임도 비슷하고, 깻잎 싫어하는 것도 비슷했어요. 취향이 비슷하니까 싸울 일이 없었죠, 둘이. ”
“정석이라는 분이랑은 고등학교 올라가면서 연락이 끊겼나요? ”
“네. 대전으로 전학가면서 연락이 끊겼어요. 그때는 뭐, 다들 수험생이라 바쁠 시즌이라 그러려니 했죠. ”
“그럼 수능 끝나고 연락이 다시 된 건가요? ”
“네. 수능 끝나고 잘 지내냐, 대학 어디 갔냐고 물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들 나눴죠. 걔가 가고 싶어하는 대학이 있는데, 거기 못 가게 돼서 재수한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
여기까지는 다른 동창들이 했던 얘기와 똑같았다.
“재수한다고 했는데, 그 해 수능 끝나고 자살했대요. ”
“자살…이요? ”
“네. 걔네 집에서 성적 갖고 압박 주거나 할 것도 없는데 왜 그런 선택을 한 건지는 모르겠어요. ”
“혹시 고등학교 졸업하고 성현씨랑은 연락 하셨나요? ”
“지금도 가끔 연락해요. 군대 가 있을때는 안됐는데… 아, 그러고보니 걔가 요즘 이상한 꿈 꾼다고 얘기했던 것 같아요. 꿈에 정석이가 나와서 놀자고 부른다고… ”
동창은 친구의 부고 소식은 들었지만, 왜 남자의 꿈에 친구가 나타나는지까지는 모르는 듯 했다.
“정석이… 아, 기억나요. 5학년때 전학 온 뒤로 친하게 지냈거든요. 성현이랑도 중학교가 갈라져서 고딩때 다시 만났는데, 그 때 성현이한테 물어보니까 정석이는 전학 갔다고 하더라고요. ”
“혹시 정석이라는 분하고 연락은 되셨나요? ”
“제가 수능 끝나고 번호를 바꿔서 연락은 안됐을거예요. ”
“아… 그럼 정석씨가 돌아가신 것도 모르셨나요? ”
“그건 다른 친구 통해서 들어서 알았어요. 기말고사 기간이긴 했지만, 마침 시험이 없어서 정석이 보내주고 왔고요. ”
만약 남자가 친구의 죽음을 모른다면, 아무도 그에게 친구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은 걸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인지는 모르겠지만, 동창은 남자가 군대에 가 있을 동안 수능 준비한다고 전화도 끄고 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휴가도 군대 사정상 자주 나오지 못했던데다가 정기휴가를 나와서도 수능 친다고 집에서 공부만 했을거라면서, 다들 수능 준비하는데 멘탈 상할까봐 아마 연락을 안 한 걸지도 모른다고 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저를요? ”
사무실로 돌아온 미기야를 맞은 것은 라우드와 타임이었다. 타임은 최근에 꿈자리가 뒤숭숭하다는 손님이 방문하지는 않았는지 물었고, 미기야가 오전중에 다녀간 남자 이야기를 하자 자기가 찾고 있는 그 사람이라면서 시간이 없다고 했다. 남자가 계속 같은 꿈을 꾸는 이유는 친구가 달라붙어서 길동무 삼기 위해서고, C도 무당 말마따나 ‘가족 아니었으면 옛저녁에 죽은 목숨’인 것도 맞았다. 하지만 친구가 처음부터 남자를 데려가려고 달라붙은 건 아니었고, 처음에는 자기가 죽었다는 걸 알리기 위해 붙어있는 거였다.
“죽었다고 알릴거면 좀 다이렉트로 알릴것이지, 몇날며칠을 놀자고 불러내기만 하는데 퍽이나 말할 수 있겠네. ”
“뭐, 그것도 그렇긴 하다만… 뭔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겠지. ”
“그럼 그 친구분을 떼어내기 위해서 저희쪽에서 뭔가 해야 하나요? ”
“할 일이라면 하나 있긴 하죠. 그 분을 친구가 봉안된 납골당으로 데려가는 거요. 위치는 제가 알고 있으니 의뢰인에게 연락 해서 내일 나오라고 하세요. ”
미기야의 연락을 받고 다음날 사무실로 온 남자는 어딘가 퀭한 얼굴이었다. 어쩌다 얼굴이 죽상이 됐냐는 파이로의 질문에 그는 어제도 같은 꿈을 꾸었다면서, 어제는 집에 아무도 없었던데다가 친구가 평소와 달리 문을 억지로 열고 들어오려고 했다면서 어떻게든 버티다가 잠에서 깬 거라고 했다. 일어나자마자 고모의 연락은 살아있냐도, 꿈 얘기도 아닌 이번이 고비라는 얘기였다.
“오늘 해결보지 않으면 의뢰인도 위험해집니다. 까딱하면 정말 죽을지도 몰라요. ”
“네? ”
“꿈 속에서 집에 혼자 계셨죠? 거기다가 친구가 문을 열고 억지로 들어오려고 했고… 문을 열고 당신을 억지로 끌고 가기라도 한다면, 현세에서는 정말 죽을 지도 모릅니다. ”
“……! ”
“지금부터 제가 묻는 말에 대답해주세요. 친구와 마지막으로 연락한 게 수능을 친 후라고 하셨는데, 그럼 그 뒤로 연락이 온 적은 있었나요? ”
“아뇨, 한번도 없었어요. 생일 축하한다고 보냈을때도 답장이 없어서 재수하느라 바쁜가보다 했습니다. 그 뒤로 저도 군대에 갔고… ”
군대에 갈 동안은 핸드폰도 꺼 놓은데다가 휴가를 나와서도 공부에 매진할 정도였던 남자는, 친했던 친구의 부고를 몰랐다.
“지금 꿈에 나오고 계신 친구분께서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정석이가… 정석이가 죽기라도 했다는겁니까? ”
“유감이지만 그렇습니다. 당신의 친구 안정석씨는 당신이 군대에 가 있을 동안 명을 달리하셨습니다. 친구분이 처음에 꿈에 나왔던 건 당신에게 자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어요. ”
“…… ”
“꿈 속에서 놀자고 불러냈던 것도, 사실은 자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어쩌면 친구분의 전달 방식때문에 이 사달까지 오게 된 걸지도 모르겠네요. ”
“말도 안 돼… 정석이가…… 정석이가 죽었다고요…? ”
타임으로부터 친구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소식을 듣고, 남자는 뭔가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그래서 계속 꿈에 나와서 불렀던건가? 왜 아무도 나에게 정석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을까? 머리가 멍해져 있던 그에게 미기야는 수능을 준비할 때인데다가 생전에 꽤 친했으니, 부고를 전했다가 멘탈이라도 크게 무너져서 성적에 영향이 갈 까봐 말하지 않은 것 같다는 위로를 건넸다.
“친구분을 만나러 가시죠.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오랜 시간동안 차를 달려 미기야, 타임과 함께 남자가 도착한 납골당에는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있었다.
“성현이니? ”
“어머님…? ”
정석의 어머니는 성현이 정석과 집에 놀러가면 항상 맛있는 음식을 차려주시곤 했었다. 그리고 막 전학을 와서 반에서 겉돌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정석과 누구보다도 잘 지냈던 성현에게 항상 고맙다고 말씀하곤 했다. 정석이 잠들어있는 납골당에 조문을 하러 온 성현을 본 어머니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내려놓고, 말없이 성현을 안고 토닥였다.
“여기는 어떻게 왔어? ”
“정석이가 불러서요. ”
“그랬구나… ”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군대에서 수능을 준비하느라 연락을 다 끊고 살았더니… 제일 친한 친구가 떠난 것도 몰랐습니다. ”
“괜찮아. 이제라도 왔잖니. ”
납골당에는 정석의 유골함과 새 꽃다발이 놓여있었다.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어머니는 이따금 아들이 잠든 납골당을 찾아 새 꽃다발을 놓아주고, 아들이 생전에 좋아했던 음식도 올려두곤 했다. 성현과 정석이 어릴 적부터 배가 터지도록 먹었던 엄마표 떡볶이와 김밥, 그리고 유부초밥을. 누가 많이 먹나 경쟁하듯,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먹는 두 사람을 보면서 어머니는 많이 있으니까 천천히 먹으라면서 주스를 주시곤 했다.
“정석아… 늦어서 미안하다. 군대 가서 수능 친다고 연락을 끊고 지냈더니… 그래서 네가 꿈에 나왔구나. 너 보러 오라고… ”
유골함 옆에 있는 정석의 사진은 그와 어울리며 놀던 시절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시간이 그 때에 멈춘 것처럼.
“그 뒤로는 별 일 없으셨죠? ”
“그 뒤로도 정석이가 꿈에 한 번 나왔습니다. ”
“또 같은 꿈을 꾸신건가요? ”
“아뇨, 그건 아니예요. ”
남자는 또 다시 꿈 속에서 친구를 만났다. 계속 어릴 적으로 돌아갔던 이전과 달리, 군대를 전역하고 성인이 된 그를 친구가 집 밖에서 불렀지만 이번에는 가족들이 어서 나가보라고 했다. 꿈 속에서 성현이 현관문을 열고 나가보니, 거기에는 어른이 된 정석이 서 있었다.
정석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키가 더 큰 모양인지 시원시원한 청년이 되어서는, 옆에 커다란 여행 가방을 두고 환하게 웃고 있었고, 한 손에는 여권과 비행기 티켓이 들려있었다. 전학간 후로는 한번도 못 만났던데다가 수능 치고 나서도 연락이 끊겼던 두 사람은 그 동안 못 나눴던 이야기들을 나눴다. 그리고 비행기 티켓에 대해 묻자 정석은 멀리 여행을 가게 돼서 작별 인사차 왔다고 했다.
“저한테는 여행이라고 했지만, 어행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저보고 천천히 오라고 했으니까요… ”
어디로 가는건지, 언제 오는건지 묻는 그에게 친구는 꽤 오래 있다가 돌아올지도 모르고, 아예 거기서 살게 될 지도 모른다면서 자리 잡는대로 연락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천천히 와야 한다’고 말한 친구는 그대로 가 버렸고, 꿈은 거기서 끝났다.
잠에서 깨어난 그가 확인한 것은, 고모가 보낸 딱 한 마디였다.
“이제 다 끝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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