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어느 남녀공학 고등학교. 서진은 이 고등학교의 1학년 2반에 다니면서, 반 친구들이 유난이 등한시하는 한 명을 관찰하고 있었다. 이미 죽어서 존재감이 없는데 귀신이 되어서 수업을 듣는다, 그런 괴담같은 얘기가 아니었다. 그 학생은 분명 반에 실재하고 있고, 출석을 부르면 대답도 하고, 담임선생님은 물론 같은 반 학생들도 그 학생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고, 살아있었지만 의도적으로 무시당하는 것에 가까웠다.
“걔, 완전히 반 애들한테 무시당해서 고립당한 채로 학교생활을 하고 있어요. ”
“다른 반에도 친하게 지내는 친구는 없나요? ”
“없어요. 아마 걔네 누나 일이 소문나서 그런가봐요. ”
따돌림당하는 남학생의 누나는 일진이었고, 학교폭력 전과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때문에 동생은 반 아이들의 의도적인 무시 속에서 학교생활을 보내야 했다. 누나가 피해자들에게 했던 짓을 그대로 돌려받지 않는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심리적인 격리 역시 일반인이 견디기에는 힘든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다가 아직 고등학교 1학년이니, 졸업하려면 앞으로도 2년을 더 다녀야 할 것이고.
“주로 어떤 식으로 괴롭히던가요? ”
“그냥 없는 학생인 것 처럼 해요. 조별과제에 끼워주지도 않고, 밥도 같이 안 먹고, 말 붙이는 애도 없고... 공지같은것도 단톡방 없었으면 확인 못 했을걸요? 시간표같은거 갑자기 바껴도 걔한테는 아무도 안 알려주던데... 뭐랄까, 있는데 없는 사람 취급해요. ”
학교 생활을 하다 보면, 취향이나 뜻이 맞는 사람끼리 무리지어서 친해지게 된다. 하지만 서진이 관찰하고 있는 그 남학생은 어느 무리에도 끼지 못 했고, 어느 무리에도 다가가지 못 했고, 어느 무리에서도 말을 붙여주거나 끼워주지 않았다. 그렇다보니 식사는 항상 혼자서 해야 했고, 공지같은 것도 알아서 챙겨야 했다. 반 아이들은 아예 그 남학생을 없는 학생 취급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표가 바뀌거나 수업 날짜가 바뀌어도 그 남학생한테는 어느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고, 가끔 수업이 바뀐 걸 모르고 엉뚱한 교과서를 꺼냈다가 당황하거나 혼난 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담임선생님이 나서서 뭐라고 해봤지만, 소용 없었다.
“솔직히 걔는 불쌍하긴 해요. 자기 누나가 일진인거지, 걔가 일진인 게 아닌데 누나때문에 피 보는거니까... 걔는 자기 누나랑 성격이 아예 달라서 누구 괴롭히고 그럴 애도 아닌데... ”
“누나의 업보를 동생이 대신 받는거네. ”
“뭔가 씁쓸하네. ”
“그녀도 몰랐을겁니다. 자신의 괴롭힘이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
서진이 관찰하고 있는 남학생은 의뢰 대상의 동생이었다. 의뢰인은 의뢰 대상의 학교폭력 피해자였고, 의뢰 대상은 일진이었고, 학교폭력을 자행해왔으며, 자신은 학교폭력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 의뢰인은 학교폭력때문에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치기도 전에 자퇴했다고 했다. 의뢰 대상은 다른 학교에서 전학을 왔는데, 전학을 오게 된 것도 강제전학이었고 의뢰인 외에도 피해자가 더 있었다. 물론, 의뢰 대상은 의뢰인을 비롯한 어떤 피해자에게도 미안해하지 않았다. 강제전학 조치가 취해지게 됐을때도, 피해자의 자살 앞에서도 말이다.
의뢰인은 자퇴한 후 검정고시를 치뤄서 대학에 입학하긴 했지만, 트라우마를 치료하느라 의뢰인은 물론 의뢰인의 가족들까지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면서 ‘저를 괴롭혔던 일진이 영원히 피해자들이 느낀것보다 더한 고통을 겪게 해 주세요’라고 했다. 죽을때까지 자신이 한 짓이 꼬리표가 되어 평생 따라다니면서, 자기가 한 짓이 자기를 갉아먹는 고통을 느끼다가 지옥에 떨어져서 고통받게 해 달라고.
의뢰 대상은 최민혜, 고등학교 3년 내내 일진으로 반에서 군림하면서 숱한 학생들을 괴롭혀서 자살에 이르게 하고, 자퇴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 지경이 될 동안 학교측은 뭘 했나 싶겠지만, 강제전학까지 당하고도 전학 간 학교에서도 날뛰면서 학생들을 괴롭히는 학생을, 요즘같이 교권이 추락했다고 하는 시대에 선생님이 통제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민혜의 부모님조차 아무리 두들겨패도 제자리걸음인 민혜를 보면서 얘를 포기해야 하나 몇 번이고 생각했을 정도니 말 다했다.
학교에서도 천둥벌거숭이마냥 날뛰던 민혜를 바꾼 건 고등학교 3학년때 새로 교생 선생님으로 온 젊은 선생님이었다. 시원시원하고 잘생긴 외모로 배우 이민호를 닮은 선생님을 보면서 나도 선생님이랑 같은 학교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 뒤로 정신을 차린건지 얌전해진 민혜는 그래도 공부머리는 있었던 모양인지 공부를 곧잘 했다. 지망하는 대학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교생 선생님이 다니는 대학 옆 학교에는 가게 된 민혜는 대학에 가서는 열심히 공부를 하기로 했다. 자기가 지금까지 했던 짓들이 소문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OT때는 몰랐는데, 개강을 하고 나니 민혜를 보는 선배나 동기들의 눈이 묘하게 싸했다. 선배들이나 동기들에게 인사를 해도 어딘가 어색한 미소로 받아줬고, 강의실에서도 그녀의 옆자리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MT나 개강총회같은 일정이 있어도 그녀에게는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았고, 어찌어찌 집합 장소를 알아내서 찾아가더라도 왜 여기에 왔냐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볼 뿐이었다. 술게임에 끼워주긴 했지만, 일부려 민혜가 벌칙을 받게 만들어서 일찍 집으로 보내버리곤 했다. 그녀가 대학 입학하는 시기에 맞춰서 복학한 여울이, 그녀의 행적들을 전부 과에 소문낸 탓이었다.
“동아리에는 제가 소문낸 건 없는데, 어느새 거기까지 퍼져 있더라고요. ”
“소문이 퍼지는 경로는 다양하니까요. ”
대학 생활을 하면서 빠질 수 없는 게 바로 동아리 생활이다. 민혜 역시 동아리 생활을 하기 위해 동아리에 가입했지만, 동아리에도 그녀의 행적이 다 퍼져서 동아리 집회나 개강총회 등 모임에 그녀를 부르지 않게 됐다. 과 행사에 참석할때마다 반겼던 싸늘한 시선은 동아리방에서도 느껴야 했고, 그녀는 결국 동아리 활동은 얼마 하지도 못 하고 유령회원으로 남아야 했다. 학년이 올라가고 후배들이 들어왔을때도, 동기들이나 선배들이 그녀를 보는 시선은 항상 싸늘했다. 조별 과제에도 끼워달라니까 끼워는 주지만, 민혜를 배제하다시피 하고 나머지 조원들끼리 다 했다.
하지만 진짜 지옥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직장에서 동료를 괴롭히거나 배제하는 사례가 뉴스에도 자주 나오는데,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네? 아, 그, 그게... ”
민혜가 이력서를 넣는 회사마다 도희와 현수가 익명으로 그녀의 과거를 투서로 보내는 통에, 그녀는 서류 면접에서 번번이 미역국을 먹었다. 어쩌다가 면접에 가게 되더라도 채용하고 싶어서 불렀다기보단 그냥 불렀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고, 면접관들은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그녀의 과거 행적과 관련된 질문들을 했다. ‘팀 내에서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 생기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특히 상대가 본인을 무시하거나 도발한다면요?’, ‘동료나 후배가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 어떻게 도와주시는 편인가요?’같은 질문에는 그럭저럭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면서 유연하게 넘겼지만, ‘고등학교 시절,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고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일진이었던 그녀를 아무도 좋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물론이고 담임 선생님, 학생부 선생님, 그리고 반 아이들까지. 반 아이들이 민혜를 멀리했던 이유는 민혜가 일진이라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였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딱 이 말이 맞았다.
결국 어떤 직장에서도 그녀를 받아주지 않자, 그녀는 알바 자리라도 구해보려고 했지만 알바 자리조차 도희와 현수의 투서때문에 구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녀가 이력서를 넣었던 식당 중에는 그녀가 과거에 괴롭혔던 사람들의 가족이나 친인척이 운영하는 곳도 있었고, 그런 곳에서는 대놓고 너같은 사람을 왜 써줘야 하느냐며 묻거나 면접을 보러 왔다가 자신을 알아본 사장님에게서 소금세례를 맞고 쫓겨나곤 했다.
대출을 받을 수 있는 만큼 받아서 보탠 다음 작은 카페를 차렸을때는, 카페 사장이 과거에 일진이었다는 소문이 퍼져서 아무도 손님으로 오지 않았다. 어쩌다가 커페를 찾는 손님은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뿐이었고, 동네 사람들은 카페 앞을 지나가면서 혀를 끌끌 차거나 손가락질을 하곤 했다. 이 정도면 가게 안에서 가끔 나오는 바퀴벌레를 손님보다 더 많이 본 것 같았다. 결국, 그녀는 카페를 폐업하고 대출금을 갚기 위해 일자리를 구해야 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그녀의 행적때문에 그녀를 고용해주지 않아 일일 알바를 전전해야 했다.
“너, 고등학생때 일진이었다면서? ”
“그게 무슨 말이야? ”
“다 알고 하는 얘기니까 발뺌하지 마. ”
“그, 그게... 맞아, 고딩때는... 근데 지금은 정신 차렸어, 진짜야. ”
“그럼 피해자들한테도 일일이 찾아가서 용서 받았어? ”
“...... ”
“네가 지금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아. 과거에 그런 짓을 했고, 피해자가 나왔고, 넌 피해자에게 용서받지 못 했어. ”
그녀도 연애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항상 끝에는 그녀가 차였다. 이유는 그녀가 과거에 일진이었던 것, 그리고 학교폭력으로 인한 피해자가 나왔으며 그로 인해 강제전학 조치까지 받았던 점이었다. 도대체 누가 퍼트리는건지, 어디서 퍼진건지 짐작도 못 할 정도로 그녀의 과거는 교묘하게 퍼졌다. 막 사귀기 시작했을 때도 아니고, 100일이나 200일째가 돼서 그녀가 SNS에 올리기 시작하면 누군가 남자친구에게 증거와 함께 그녀의 과거를 찔렀다.
“나도 학교폭력때문에 괴로워했던 과거가 있어. 그렇기때문에 너같은 사람을 더더욱 용서 못 하겠어. ”
“자기야... ”
“헤어지자. 네가 그런 사람일 줄 꿈에도 몰랐어. ”
그녀와 사귀었던 남자들 중에는 학교폭력의 피해자였던 사람도 있었다. 트라우마때문에 고생하고, 겨우겨우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딛고 일어난 사람도 있었지만, 가족이나 지인이 학교폭력 피해자였던 사람도 있었고, 무슨 악연인건지 그녀가 괴롭혔던 사람의 친인척과 사귀게 된 경우도 있었다. 사귈때는 몰랐지만, 사귀고 나서 인사를 갔을 때 피해자의 반응을 본 남자쪽에서 민혜의 과거를 알게 됐고, 자기한테 소중한 사람을 괴롭힌 사람과는 평생을 함께 할 수 없다면서 헤어졌다. 어찌어찌 결혼까지 갔던 남자도 있었지만, 결혼 준비를 한다는 얘기를 SNS에 올리고 며칠 후에 누군가 그녀의 과거를 예비신랑의 부모님에게 보냈다.
“난 이 결혼 반대다. ”
“왜요? 어제까지는 분위기 좋았잖아요. 근데 왜... ”
“이걸 보거라. ”
“......! ”
결혼하겠다고 남자쪽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을때만 해도 분위기가 좋았는데, 그녀의 과거를 알게 되고 나서는 남자쪽 부모님이 결혼을 극구 반대했다. 남자쪽에서도 이유를 알게 되고 나서는 이별을 선언했고, 그녀는 취업이고 연애고 그녀의 과거가 발목을 잡아서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녀의 동생이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할 무렵, 그녀의 부모님도 일진의 부모라는 소문이 퍼져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감당해야 했다. 민혜가 대학을 가게 되자, 자취방을 얻어주겠다면서 내쫓다시피 한 부모님은 그 뒤로도 그녀와 절연하다시피 했다. 돈이 필요해서 연락하면 용돈정도는 보내줬지만, 이제 너도 성인이니 슬슬 알아서 하라는 잔소리는 덤이었다. 자취방 계약이 만료됐는데도 집주인들이 그녀의 과거때문에 계약을 거절하는 바람에 집을 구하지 못해서 잠시 본가에서 지낼때는 부모님의 압박 뿐 아니라 동생의 원망도 들어야 했다. 계속되는 원망과 질책을 견디다 못 한 그녀는 도망치듯 어느 달동네로 이사했지만, 달동네에서도 그녀는 고립되다시피 했다. 그 곳에도, 그녀의 행적이 퍼져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부모님이나 남동생은 그녀를 이사보낸 후 집을 이사가고 나서 더 이상 손가락질은 받지 않게 됐고, 남동생은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쳐서 대학에 들어가서 대학생활은 잘 하고 있다는 것이겠지만, 행복한 가정생활에 그녀가 설 곳은 이제 없었다.
“무엇이든... 취급합니다? ”
그녀가 사는 달동네에는 수상한 가게가 있었다. 6~70년대에 달고 한번도 안 내렸을 법한 낡은 간판에는 ‘만물상’ 세 글자가 쓰여있었고, 문에 붙어있는 종이에는 ‘어떤 물건이든 취급합니다’라고 쓰여있었다. 종이가 붙어있는 문짝도 요즘 짓는 집에서는 안 쓸 법한 낡은 철문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니, 그 가게는 정말로 없는 게 없는 만물상이라 원래대로라면 시중에 안 풀렸을법한 것들도 다 파는 곳이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가게 안은 어릴 적 학교를 마치고 갔던 문구점이나 어릴 적 시골에서 사촌들과 함꼐 갔던 구멍가게를 연상케 하고 있었다.
“어서오세요, 만물상입니다. ”
만물상에 들어선 그녀를 맞이한 것은 주인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였다. 찾는 것이 있는지 물어보는 주인에게 민혜는 그 동안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한탄하듯 얘기했다. 대학생활도 자신의 과거때문에 제대로 못 했고, 취업은 물론이고 연애, 결혼까지 자신의 과거가 망쳤다, 이 과거를 지우거나 바꿀 수 있는 물건이 있다면 얼마를 주더라도 사고 싶다. 그리고 그녀의 얘기를 들은 만물상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상당히 뜻밖이었다.
“과거를 지울 수 있는 물건도, 과거를 바꿀 수 있는 물건도 물론 있죠. 하지만 당신의 죄질이 너무나도 악해서, 그 물건들로 과거를 지우거나 바꾸려면 수백억은 들고 와야 할 겁니다. ”
만물상 주인은 그녀의 모든 것을 꿰뚫기라도 한 듯, 그런 물건은 있지만 민혜에게는 팔 수 없다면서 거절했다.
“과거가 꼬리표가 된 탓에 이런 곳까지 도망쳐 오신 모양이군요. ”
아무런 소득도 없이 터덜터덜 만물상을 나오던 그녀에게 꽤 고급스러워보이는 검은 코트에, 검은 바지를 입은 어딘가 불길한 미소를 띤 까무잡잡한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어째서인지, 남자는 꽤 반가운 기색을 하고 있었다. 그는 민혜에게 과거의 행적을 지울 방법을 알려주겠다면서, 자신에게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고 간단한 일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 간단한 일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꼬리표를 뗄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하고 싶었던 그녀는 순순히 남자의 제안에 따랐고,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를 따라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 무렵에는 고키부리 사무실에서도 손을 뗀 지 꽤 됐다. 민혜와 결혼할 남자와 가족에게 보낼 투서를 정리하던 도희의 머릿속에,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무의 바다에 녹아내린 것 같은 목소리는 그녀에게 ‘기어오는 혼돈이 그 자를 양치기로 데려갈 것이댜’라고 말하면서 슬슬 손을 떼는 게 좋을거라고 했고, 그 말대로 도희는 마지막 투서를 기점으로 일에서 손을 떼게 됐다.
“여기는...? ”
“보시다시피 목장입니다. ”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를 따라 도착한 곳은, 평화로운 목초지 한가운데에 있는 목장이었다. 검은 울타리를 둘러놓은 목장 안에는 탐스러운 털을 가진 검은 양 10마리가 있었고, 양은 울타리 안에서 낮잠을 즐기거나 바깥을 한가로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양몰이 개나 염소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고, 울타리 옆에는 양들이 잠을 자는 공간과 헛간 한 채가 있었다. 검은 코트의 남자는 이 곳이 ‘어머니’의 목장이고, 저 양들은 전부 어머니가 기르는 양이라면서 지금부터 이 양들을 잘 먹이기만 하면 된다면서 양들을 돌보는 법이 적힌 종이를 건넸다. 종이에는 양들에게 밥을 먹이는 법, 털 관리하는 법, 그리고 하루 일과가 적혀있었다.
“이 양들은 전부 어머니가 기르는 양입니다. 속죄하는 셈 치고 이 양들을 잘 먹이고, 잘 돌봐주면 어머니께서 용서해주실지도 모르죠. 그러면 꼬리표도 사라질겁니다. ”
‘양에게 먹이를 주기만 하면 된다고? 정말 이 양들만 잘 기르면 되는건가? ’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사라지자, 그녀는 시계를 확인했다. 그리고 양들에게 점심을 먹이기 위해 헛간으로 들어갔지만, 그 곳에 건초는 없었다. 양들이 꽤 많이 먹을텐데, 풀이라도 넉넉하게 베어놔야지.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헛간에서 풀을 베기 위한 도구를 찾았고, 구석에 세워져 있던 사람 키만한 낫을 찾았다. 그리고 마른 풀을 베어서 실을 손수레를 찾은 순간.
-서걱
낫이 멋대로 공중에 떠서 움직이더니, 뭐라 말할 새도 없이 그녀를 토막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수레는 낫이 베어버린 토막을 담아서 양의 먹이통으로 스스로 굴러갔고, 먹이통에 토막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양들이 다가와서 먹이통 안에 있는 먹이를 먹기 시작했다. 양은 초식동물이라 사람을 들이받는 경우는 있어도 사람을 뜯어먹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양은 왜 자신을 뜯어먹는건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토막났다면 분명 죽었어야 했지만 의식이 또렷한 이유도, 영들에게 뜯어먹힐 때 온 몸의 감각이 살아있는 이유도 알 수 없었다. 먹이통을 비운 양들이 배가 부른지 다시 목초지로 나가고 얼마 후, 먹이통이 저절로 움직이면서 그녀의 머리가 바닥으로 툭, 굴러떨어짐과 동시에 그녀는 되살아났다.
그녀가 정신을 놓아버린 것은, 이렇게 양들의 저녁을 먹이고, 다음날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또 다음날 아침, 점심 저녁... 몇 번이고 양들이 자신의 살을 씹어 삼키는 감각을 느끼면서 양들의 먹이가 되어가고, 이를 끝없이 반복해야 할 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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